육영수 프로필

육영수 몇년생?
1925년 11월 29일
육영수 사망년도
1974년 8월 15일(향년 48세)
육영수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육영수 본관
옥천 육씨
육영수 학력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배화고등여학교
육영수 키
170cm
육영수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 박정희 대통령과 합장된 것이 아니고 쌍봉분으로 따로 묻혔다.
육영수 가족
남편 박정희
자녀 박근혜, 박지만, 박근령
여동생 육예수
육영수 종교
불교, 법명 대덕화
육영수 집안과 생애
육영수 여사의 아버니는 육종관으로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로 지역유지 겸 사업가였다.
1920년에 집에 전화기와 자동차가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부잣집임을 알 수 있다.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옥천여자전수학교(옥천여중)에서 1년 3개월간 가사과목을 맡아 교사 생활을 했다.


1950년 사촌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났고, 그해 12월 12일 천주교 계산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 나이 34, 육영수 나이 26이었다.(박정희는 첫째부인 김호남과 이혼한 직후 재혼)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는 이혼경력이 있고 군인이라는 점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는데,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음에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5년 사망직전 병문안 온 사위에게 “내 부덕하여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 영부인- 청와대의 야당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입성하면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으로 활동했다.
항상 한복차림과 소박한 모습을 고수했고, 청와대로 온 민원이나 편지들을 처리했다.
또한 영부인으로서 사회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특히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서 고아원과 보육원에서 주로 봉사활동을 했다.

육영수 여사와 한센병 환자(나병 환자)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는 한센병 환자를 속되기 문둥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육영수 여사는 한센병 환우들을 청와대 다과헤에 초대했고, 본인이 직접 전북 나주시의 한센인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 덕분에 딸인 박근혜가 훗날 대통령으로 출마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소록도에서 62.65%의 득표를 기록했다.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전라도에서 60%가 넘는것은 기록적인 일이었고, 이는 육영수 여사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육영수 여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은편이다.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문세광
1974년 광복절 행사, 박정희를 저격하려했던 문세광의 총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두부관통상으로 육영수여사의 나이는 향년 48세였다.
이때 문세광의 총으로 육영수 여사, 합창단원 고2 장봉화 학생도 사망했다.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은 국민장이었고, 20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영부인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박근혜는 22살의 나이에 한국으로 귀국했고, 박정희 대통령 사망전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했다.


